호세아

24-10-30 18:39

12. 내가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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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강해 12.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호세아 11:1–12 (NKRV)

1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10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11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훈계입니다. 정죄나 심판의 메시지가 아니라 훈계입니다. 그분의 자녀를 향한 사랑의 훈계입니다. 이것을 알 때 호세아서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톤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애끊는 심정을 표현하시는 것이 11장의 내용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십니다. 

호세아 11:1 (NKRV)

1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어떤 아들입니까? 어렸을 때 사랑하여 애굽에서 불러낸 아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하나님은 남편이시고 우리는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우리는 자녀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고 계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십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를 알지 못하기에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호세아서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신부를 맞이하여 끝까지 사랑하시는 남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는 간음한 아내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체험적으로 증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아내를 얻어 부정한 자식들을 낳게 됩니다. 그럼에도 사랑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요? 그의 인생이 인간적으로 보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밖에 자신의 심정을 알릴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기 전까지 그 사람의 심정을 알 수 없습니다. 때때로 자녀들에게 “네가 아이 낳고 살아봐야 엄마 심정을 알지”라고 합니다. 엄마가 되어 자식을 낳아 키워보기 전까지 엄마의 심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신의 심정을 깨닫게 하시려고 어떤 자리에 서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호세아는 간음한 여인을 맞이하여 함께 살아야 하는 자리에 서야만 했습니다.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양육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했고,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야 했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호세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자신의 심정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명을 주십니다. 어떤 사명일까요? 먼저는 아빠, 엄마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결혼해 자식을 낳고 길러보면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아빠, 엄마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적 사랑, 모성적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피상적인 하나님이 체험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내가 사랑하여 입양한 아들이 나를 떠났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입양한 자식들입니다. 세상에 버려져 유기된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에베소서 1:5 (NKRV)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 아들들’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휘오데시아’, 입양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입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 삼았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으사 정결케 하셔서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자녀, 엄밀히 말해 입양자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만, 성경이 쓰인 시대에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할 정도로 경외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사역했던 제 동료는 예루살렘에 예배당을 짓고 외벽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간판을 붙여 놓았는데 다음날 ‘하나님’이란 간판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벽에 걸거나 책에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님” 또는 “아도나이”로 아둘러 표현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양육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은, 인격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시고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합니다. 권위적이고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라 사랑이 많고 좋은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부성적, 모성적 사랑을 발견합니다. 

호세아 11:3–4 (NKRV)

3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하나님은 아기의 두 손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아기를 포대기에 메고 재우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사랑의 줄로 이끌었다”라는 것을 새번역 성경은 ‘사랑의 띠로 묶어서 업고 다녔다’로 번역했습니다.

 

세상에 버려져 유기된 우리, 죄로 인해 더럽혀 진 우리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어머니가 되셔서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큰애를 만나기 전 입양을 기다리는 몇 명의 아기를 만났습니다. 한번은 12월의 추운 날. 논산의 병원 앞 주차장 차 안에서 한 아기를 만났습니다. 소장님은 아기를 안아 보라고 했습니다. 아기는 눈에 초점이 없었습니다. 초점을 맞추려고 해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몸은 히마리 없이 축 처져 있었습니다. 소장님은 지금에 이 아이를 천안에서 데려온 것이라 했습니다. 어린 엄마는 술집에 다니는데 술과 담배에 절어 산다고 합니다. 집안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가 없는 것처럼 불쌍한 것도 없습니다. 부모는 있는데 악하다면 그 또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모가 되기 전 우리의 부모는 마귀였습니다. 

요한복음 8:44 (NKRV)

44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애굽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곳에서 불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불러냈습니다. 걸음을 가르치고, 팔로 안으시고, 포대기로 업으셨습니다. 

출애굽기 19:4 (NKRV)

4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힘과 지혜로 온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를 업고 오신 것입니다. 

시편 121:3–8 (NKRV)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우리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졸 수밖에 없습니다. 밤에는 자야 합니다. 인간적 한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지 않고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것입니다. 그냥 독립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사랑하고 섬긴 것입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세상적 성공, 사람들이 인정과 평판, 돈, 학위, 자녀 등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섬깁니다. 사랑하는 것에 마음을 쓰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일 때, 또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닐 때 우상입니다. 

 

청소년 아이들이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여 콘서트장에서 환호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날마다 그 가수를 생각하고, 그의 영상을 보고, 기회만 되면 공연장을 찾아갑니다. 그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아이돌 가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합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돈을 모으기 위해 주식에 마음을 뜻과 힘을 다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주식이, 돈이 우상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권력이 우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런다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호세아 11:2 (NKRV)

2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자식의 외면

원문에 선지자들은 없지만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외침을 통해 그들을 돌이키라 불렀습니다. 오늘날도 말씀을 선포하는 종들을 통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돌이키라 하십니다. 그런데 부를수록 점점 멀리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관심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호세아 11:5 (NKRV)

5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할까요? 하나님의 간섭이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자녀로 양육하시는데 그것이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시는 것이 영 불편한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누군가의 간섭받기를 싫어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해, 그렇게 살면 안 돼.” “이 길로 가야 해, 그 길로 가면 안 돼.” 하는 말들이 듣기 싫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613개인데, ‘이렇게 하라’ 248개와 ‘이것을 하지 말라’ 365개입니다. 거기에 구속되어 사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자녀로 존엄하고 정결하게 살게 합니다. 도로교통법이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듯, 하나님의 법안에 살 때 안전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을 떠나 자기 맘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아야 할 유산을 미리 챙겨 떠납니다. 왜 아버지는 막지 않았을까요?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가 왜 자식에게 지는 줄 아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싸움은 항상 사랑이 많은 쪽이 집니다. 

떠난 자식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아버지는 압니다. 종들을 시켜 막을 수도 있었고, 유산을 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줍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들을 포기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국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찾아 떠나지만, 그 인생이 망가질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훈계하고, 때려도 떠난 마음은 붙들 수 없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부모가 하는 것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것입니다. 비록 안타깝지만 아버지 품을 떠나면 어떤 결과가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호세아 11:5–7 (NKRV)

5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스라엘은 30년 후 앗수르에게 의해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품을 떠난 결과입니다.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들이 자초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야 맙니다.

 

양육의 목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양육하실 때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성품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디도서 2:12 (NKRV)

12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경건하지 않는 것과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 분별력, 지혜를 의미합니다.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원하는 삶이 이것입니다.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베드로후서 1:4 (NKRV)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 썩어질 것을 위해 욕심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런 헛된 인생 살지 말고 신성한 성품, 하나님의 성품(새번역), 하나님의 본성(공동번역)에 참여하는 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상태였습니까? 세상의 자녀였습니다. 우리 부모가 마귀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정욕과 악한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양육하십니다. 교육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그 일을 하십니다. 

 

디모데후서 3:16–17 (NKRV)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십니다. 말씀을 통해서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연단하고 훈련하시어 우리 안에 있는 세상 정욕과 악한 생각을 제거해 가십니다. 

야고보서 1:2–4 (NKRV)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러 가지 시험은 고난의 형태로 우리에게 옵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련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연단, 즉 강하게 하는 시련입니다. 이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드리는 제물을 표현할 때 쓰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합당한 성품의 사람들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를 써먹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들로 세우길 원하십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징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성품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떠날지라도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포기합니다. 사람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11:8 (NKRV)

8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함께 멸망한 도시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11:9 (NKRV)

9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즐기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굴복한 것입니다. 징계가 무서워 하나님 품에 있는 것은 영적으로 어릴 때입니다. 말씀으로 양육 받고, 믿음의 시련을 통해 성장하면, 하나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성장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호세아 11:10 (NKRV)

10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사자처럼 내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떠났던 자녀들이 돌아옵니다. 그 소리가 과연 무엇이기에 세상을 사랑했던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이 소리가 십자가라고 믿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사자처럼 외치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 오신 하나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온갖 모욕을 다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라고 하나님께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며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했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다 이루었다며 우리 죗값을 완전히 치르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사자처럼 외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십자가로 시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사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로 세우길 원하십니다. 이 목표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삶에 시험과 믿음의 연단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호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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