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14.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호세아 13:1–16 (NKRV)
1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2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3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4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5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6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7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8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9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10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11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12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13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14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15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16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을까요?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았고 이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십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그의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집 나간 탕자처럼, 네 맘과 뜻대로 살지 말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지 말고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친밀할 때 신앙이 깊어 집니다. 이 관계가 멀어질 때 타락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친밀했던 관계에서 멀어졌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을 등진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천천히 멀어졌습니다. 자각 증상이 없는 질병처럼, 그들은 천천히 무너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가난입니까? 질병입니까? 마음의 염려와 두려움 때문입니까? 내 곁에 있는 사람 때문입니까? 내가 속한 공동체 때문입니까? 일의 분주함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3:6 (NKRV)
6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삶의 풍요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삶의 풍요가 우리 마음을 교만하게 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을 잊습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사실입니다.
잠언에 보면, 아굴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잠언 30:7–9 (NKRV)
7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부하게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혹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부함이 저주가 될 때가 있습니다. 부해져 하나님을 잊게 되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여로보암2세 때는 국가적으로 부강할 때였습니다. 국제정세나 국내정세가 안정될 때였습니다. 그때 교만해졌습니다.
왜 우리는 배가 부르면 마음이 교만해 질까요? 교만해져 하나님을 잊는 것일까요? 이것은 죄인들의 본성입니다. 삶에 어려움이나 문제가 없으면 쉽게 교만해지는 것이 우리의 죄성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지만, 어려움이 끝나고 평안해지면 하나님을 잊습니다. 이 상태에서 돈도 있고 시간도 많아지면 타락하기 쉽습니다. 최근 뉴스에 등장하는 마약 파티를 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무엇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의사, 교수, 변호사입니다. 쉽게 죄에 빠지는 사람들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넘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평안의 시기가 찾아오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패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삶에 어려움이 생길 때는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내 능력으로 도무지 해결할 수 있는 삶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찾게 되고 눈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현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면 헌신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어떤가요?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평안해지면, 잠기 감사는 하겠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삽니다.
호세아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답답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화가 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사랑하는 자들을 향한 애정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화낼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자신의 품을 떠난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불행의 길,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이르고, 설득하기를 몇 번. 이제는 너무 화가 나서 이렇게 고함을 치십니다.
호세아 13:7–8 (NKRV)
7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8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호세아서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그의 백성을 부정한 아내로 표현합니다. 부정한 아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재물도 드리고 기도도 하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마치 다른 남성을 마음에 품은 아내와도 같았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아내가 다른 남성을 마음에 품고 늘 그를 생각하며 시간이 날 때 마다 만나고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지극정성으로 딴 남자를 사랑하시면 어떠시겠습니까?
고상하고, 점잔은 말투로 “만나지마”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분노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돌아서도록 조용히 기도만 하시겠습니까?
“당신 그 사람 한 번만 더 만나면 죽여 버릴 거야”. “그 놈 머리카락 다 뽑아버릴 것야” 고함을 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배신감은 클 것이고, 기대한 만큼 실망은 클 것입니다. 화나면 못 할 말이 없지요.
“당신 죽여버릴 것야” 그 만큼 사랑했고, 믿었고, 기대했다는 표현입니다.
“이혼해, 갈라서”. 나 절대 이혼 못 하니까 제발 정신 차리고 돌아오라는 절박한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에게 고함을 치시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도 경고하십니다.
호세아 13:15–16 (NKRV)
15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16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
너희가 자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재산이 한순간에 약탈당하리라는 것입니다. 형벌을 당하고, 어린 아이가 부서뜨려지고 아이 밴 여인의 배가 갈라진다는 것은 전쟁의 참혹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보호 손길이 거둬져 결국 주변국의 침략을 당해 참혹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기보다는 그들이 자초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굳이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길을 거두시면 즉시 참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위기는 평안할 때 찾아옵니다. 가난할 때가 아니라 풍족할 때입니다. 병들었을 때가 아니라 건강할 때입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가 아니라 잘될 때입니다. 이때 시험이 찾아옵니다. 영어 성경은 이 시험을 테스트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 얻은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22:1–2 (NKRV)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 일 후‘에는 21장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세가지 사건이 등장합니다. 1)이삭이 태어납니다. 2)가정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첩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 집을 떠나 새로운 가문을 이룹니다. 3)아브라함이 거주했던 땅의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고 평화롭게 지내게 됩니다. 어떤가요? 아브라함의 인생에 가장 평탄한 시기를 보낸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합니다.
이 시험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시험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가에 대한 시험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다면 순종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순종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가에 대한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을 번제단 위에 올리고 칼로 죽이려 했습니다. 그는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우리는 그의 순종 여부에 관심을 가지지만, 사실 그 이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입니다.
첫째, 그가 알았던 하나님은 이방 신들처럼 인신 제사를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그 후손은 독자 이삭을 통해 이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삭은 반드시 결혼해 자녀를 낳을 때까지 죽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삭을 죽인다고 할지라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근거를 두 군데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동행했던 두 종들을 산아래 두고 이삭과 단둘이 산위를 오를 때, 그의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22:5 (NKRV)
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우리‘가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이 산을 내려올 것을 믿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1:17–19 (NKRV)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삭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신뢰, 즉 믿었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거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는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만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의 품에서 떠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시험에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시험에 든다는 것은, 시험의 상황이 나를 주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시험의 상황에 빠져 하나님을 향한 부정적 생각이 머리를 채우고, 현실과 주변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올라올 때 시험에 든 것입니다.
감사했던 입술에서 불평이 나옵니다. 찬양했던 입술에서 원망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보낸 40년의 기간이었습니다.
신명기 8:2–3 (NKRV)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시험하셨다고 하십니다. 왜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알려고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 마음을 알려고 했다는 것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시고 그들 스스로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시험은 그들이 굶주렸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만나로 먹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실 때였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메추라기로 고기를 먹게 하실 때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 손길이 날마다 체험되는 시기였던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만나가 내려 있었고 그것을 거두어, 조리해 먹었습니다. 메추라기 떼가 광야에 떨어지면 거두어 구워 먹고, 삶아 먹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구름으로 해를 가려 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막아 주시고, 동물의 위협으로 보호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0:7–13 (NKRV)
7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족함이 없을 때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고, 음행을 했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 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무슨 말입니까? 모든 것이 평안할 때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평안의 때가 시험의 때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시험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시험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시험을 통과하면서 시험에 들어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들은 평안할 때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영적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평안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시험이 임할 때 어떻게 대처야 할까요? 시험은 평상시 우리의 영적 상태, 영적 실력을 드러냅니다. 학생들의 실력이 시험을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 실력, 영적 상태는 시험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영적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첫째는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안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때로는 불순종 하면서 알아갔습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네 씨를 통해 한 민족을 이루겠다 하셨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자 첩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비록 연약하여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99세 때에, 자신과 아내가 생식능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아내 사라의 태에 아기가 들어섰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과 신신하심을 굳건하게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끊임없이 묵상하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두 번 은혜 받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그 신실하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한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위에 견고하게 설 때, 어떤 시험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결론부에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평상시 두 집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이것이 시험입니다. 집의 상태는 달라집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쓸려 내려갑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흔들릴 수 있지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견고합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복음 7:24 (NKRV)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말씀에 대한 묵상과 순종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영적으로 강하게 합니다.
두 번째는 기도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4:38 (NKRV)
38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도로 십자가를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빌라도 앞에서 담대하셨고 당당하셨습니다.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상시에 기도하는 성도들을 시험의 때에 담대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묵묵히 참고 견딥니다.
야고보서 1:12 (NKRV)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험은 참는 자가 복된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들은 시험을 참고 견딥니다.
야고보서 5:13 (NKRV)
13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야고보서에서 고난은 시험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습니다. 시험을 당한 자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시험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가 시험에 들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합니다. 시험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모든 성도가 다 겪기 때문입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이 떨어져 파장이 일 듯이, 잔잔한 우리 인생에 시험의 순간은 찾아옵니다. 이스라엘은 평안할 때 하나님을 잊었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력과 능력 그리고 지혜를 의지했습니다. 주변국과 외교를 통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30년 후 앗시리아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비참한 식민국가로 전락합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던 재앙을 겪고 맙니다. 그들이 자초한 결과입니다.
평안할 때,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셔야 합니다. 더 감사하고 더 찬양해야 합니다.
기도하시는 분들은 기도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베드로가 시험에 들었지만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누가복음 22:31–32 (NKRV)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아무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님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8:26 (NKRV)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실타래처럼 꼬인 삶의 문제들을 여러분이 나서서 풀려고 하지 마세요. 더 엉키고 더 뒤틀립니다. 기도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지켜보세요. 인내하시면서 견디시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결국 그들의 평안할 때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평안할 때, 더욱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와 말씀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누리는 평안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시고, 그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시고, 사랑하고 신뢰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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